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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긍휼이 여기는 자여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7-09-11 (월) 19:57 조회 : 26
09102017_주일설교.docx (15.8K), Down : 0, 2017-09-11 19:57:11
설교일 : 2017.09.10.
설교자 : 장찬영 목사
본문말씀 : 마태복음 5:7

5:7(장찬영목사)                                                              9. 10 2117

 

                             행복하여라: 긍휼이 여기는 자여

 

1.

이번 주간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 보게 된 책이 하나 있는데, 바로 메리 고든(Mary Gordon) 박사가 쓴 공감의 뿌리(Roots of Empathy)라는 책입니다(책 그림). 공감이란 아시는대로 상대방의 마음이나 형편을 이해하고 느끼는 마음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캐나다 토론토에서 유치원 교사였던 메리 고든은 말 그대로 이 공감의 뿌리를 찾는 것이 다른 어떤 교육보다도 선행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이들이 말이나 숫자를 터득하는 것보다, 자기의 감정을 올바로 이해하고 전달하는 감성 능력과 더불어,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법공감 능력(Ability of Empathy)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녀는 지역에 사는 아기들을 대상으로 그 아기들의 초등학교/중학교까지의 발달과정을 지켜보면서, 특별히 과도한 경쟁 교육 속에서 다치고 소외된 아이들에게 자신과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아이들의 공감 능력은 물론 학습 능력도 향상되었고, 더 놀라운 것은 이 공감 능력은 아이들이 성장하여 대학에 가고 직장에 가며, 이후의 결혼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책 부제가 Changing the World, Child by Child(아이들 한명 한명이 세상을 바꾼다)입니다.

 

최근, 한국이 외부적으론 북한의 핵도발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편 지난 주에 일어났던 [부산 여중생 집단폭행사건]으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이번엔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미성년자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그들의 나이와 미 성숙도를 참작하여 형벌을 감형해 주는[소년법]을 폐지하자는 얘기가 구체화될 정도입니다. 사건은 같은 학교의 여중생을 몇 시간 동안 폭행을 했는데, 얼마나 잔인하게 때렸는지CCTV를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차 못하였고, 이렇게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무릎을 꿇게 한 사진이 SNS를 통해 확산된 것입니다. 또 바로 전 주간에는 십대 여자아이들이 초등학교 아이들 유괴하고 결국 살인까지 하는 사건이, 몇 달 전에는 초등학생아이들이 같은 반 아이 하나를 상습적으로 구타하고 돈을 뺏는 일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이 같은 일들이 어제 오늘의 일들은 아니었지만, 정작 충격적인 것은 아이를 그렇게 만든 가해자 아이들에게 너희들 왜 이런 짓을 했니? 물으니까, 재밌쟎아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묻기를 만약 너희가 그렇게 당하고 맞으면 어떨 것 같냐?고 하자,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해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해자 측의 부모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한 부모는 대뜸 다 맞을 짓을 하니까 우리 아이들이 그런 게 아니겠냐? 피해자 가족들 마음이 어떻겠느냐? 물었더니 가해자 아이들의 부모 중에 변호사 통해서 해결하면 되는데 이렇게 크게 일을 벌리느냐고 오히려 맞고소를 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가만히 보면서, 제가 참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쩌다 우리 아이들이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것과 우리라는 존재는, 아이나 부모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공감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존재구나 라는 것입니다. 이런 한국의 이런 기사를 대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교육을 바꿔야 하고, 사법부의 법을 바꿔야 한다고 성토할 수 있지만, 적지 않은 부분에서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역시도 이 공감 장애를 갖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고든 메리가 하루는 이런 실험을 합니다. 유아들을 한 방에 모아 둡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기들이 따라서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조금 후에 그 중에 몇 명의 유아는 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옆에 있는 아기에게 다가가서 우는 아기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인생의 첫 공감으로 명명했는데, 저는 이런 일련의 그녀가 했던 실험들을 보면서 마음이 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녀는 이 어린 유아들을 통해서라도 이 땅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더 이상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아파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아기들을 통해, 상대방을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같이 울어주는 공감의 작은 풀뿌리를 보면서, 마치 이 증거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마음이라고 라는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2.

오늘은 다섯 번째 팔복, 긍휼이 여기는 자 , 긍휼에 대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분이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시기 위해, 우리와 눈을 맞히기 위해, 얼마나 공감하시려고 하셨는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쓰신 긍휼은 헬라어로 엘레오스(Elleos)인데, 이 말의 일반적인 뜻은 자비, 불쌍히 여김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속뜻을 우리는 이 엘레오스의 히브리어 어원인 레헴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레헴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 긍휼이란 단어의 뜻은 그저 누군가를 보았을 때 느끼는 동정심, 불쌍한 마음 정도가 아니라,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갖는 측은지심의 마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의미와 가장 가까운 뜻이 룻기에 나오는, 이방여인 룻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헤세드]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이전 팔복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긍휼역시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설령 누군가를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긍휼과는 다릅니다. 사도 요한의 고백인,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14:10)....처럼, 이 긍휼도 우리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먼저 나를 긍휼히 여기셨기에 나도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내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까? 거기에는 다 조건과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을 알고 나니, 조건과 한계를 뛰어넘어 누군가를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는지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세상에 내려 오셔서 그저 옆에서 구경만 하고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난을 받으실 뿐 아니라, 고난받는 자의 아픔과 연약함을 너무 잘 아시기에 능히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사랑한다고만 하지 않으시고,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모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인 것입니다.

 

, 여기서 여러분께 질문 하나를 여쭙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이십니까? , 그렇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먼저 우리는 예배를 통해 이 하나님의 긍휼을 매 순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고백이 무엇이냐...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키리에 엘레이손). 이 고백은 초대 교회 이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이 고백되었던 찬가와 기도문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내가 먼저 긍휼이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시간인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도 사람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삶의 은혜의 길이 열리는 법... 무슨 누가 감히 나를 긍휼히, 불쌍히 여겨? 나는 다 내가 알아서 삽니다...아닙니다. 사람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는 자고로 부모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자녀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불쌍히 여김을 입어야 마땅하고, 남편도 아내의 불쌍히 여김을 입어야 마땅합니다. 성도도 목사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양이 되고, 목사도 교우들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비로소 목자가 됩니다. 불쌍히 여김은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향한 동정이나 연민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김은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 이제는 기꺼이 누군가에도 불쌍히 여김을 받고, 또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모든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아무도 돕지 않는 비참한 거지 소경, 바디매오의 외침이 바로 저의 외침이었습니다. 저도 거지였고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저의 외침을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보이게 보이지 않으시게, 빠르게 혹은 더디시게라도 그분은 당신의 긍휼의 당신의 때에 베풀어 주셨습니다. 때로 저는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가야 할지도 모를 정도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맬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도 저의 기도는 키리에 엘레이손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기도, 역시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무슨 정당한 자격이 있어서 그분 앞에 나가 나의 기도제목과 나의 간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틈만 나면 죄를 지을려고 하고, 틈만 나면 누군가를 송사하고, 기회만 주어지면 나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아무리 보아도 선한 것 하나 없는 나를, 그분이 다 덮어주시고, 모른 척 해 주시고, 불쌍히, 긍휼히 여겨주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 긍휼하심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 이스라엘아, 너희에겐 긍휼이 없구나... 그렇게 내가 너희를 긍휼히 여겼는데, 너희는 나의 긍휼을 다 잃어버리고, 기껏 긍휼을 베푸는 것도 결국은 다 너희의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긍휼이구나. 말로만 하는, 그런 척만 하는 그런 거짓 긍휼이구나...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그래서... 이제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기는 나의 속 마음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이야기를 통해 긍휼에 관한 우리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십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는데, 몹시 매를 맞고 가진 것을 다 빼앗긴 채 쓰러져 거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차례로 그 곁을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지요? 바로 저와 여러분,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이었는지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자비를 베풀지 않고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누구지요? 성전에 들어오지도 하는 이방인입니다. , 교회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강도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자신이 갖고 있던 포도주와 기름을 그의 상처에 바르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 치료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 치료비가 더 들면 자기가 돌아오는 대로 갚겠다고 까지 하고 떠납니다.

 

, 이 이야기를 다 하신 다음,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십니다.

10;36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사람들이 답합니다. 자비(긍휼/Elleos)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실 이 말씀은 현장에 있지 않았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과 나름의 방어자세를 갖게 합니다... 꼭 이래야 긍휼을 베푸는 것일까? 사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도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시간과 경제적인 부담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긍휼이라면 생각이 많아지는데... 솔직히 이 비유에 대한 묵상이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은 우리에게 다 똑같이 적용될 수 없고, 또 이와 똑같이 할 수도 없을지라도, 한 가지, 주님이 말씀하신 긍휼, 누군가를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돌보는 것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 이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와 사람들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고, 그런 가운데서도 굳이 민감한 제사장과 레위인까지 등장시킨 것은 삶이 없는 복음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한 엄중한 질책이시자 경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사마리아인의 등장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완성시킨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긍휼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단호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분명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어떻게 삶으로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은 가능하겠지만, 형제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마다 계속해서 그를 돕고, 또 그의 처지가 되는 공감의 마음을 갖고, 나의 있는 것을 나누어 주고, 함께 고통을 감수하고, 필요하면 그가 원하는 것을 해 줄 수 있는가는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이루실 당신의 긍휼에 대한 고집을 꺽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그럼에도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실까요? 뻔히 우리가 못할 할 줄 아시면서, 어차피 행하지 못하니까 말씀을 가지고 스트레스라도 받으라는 것일까요? 여기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긍휼히 여기는 것이 1.결코 너희의 의지로나 너희의 태생적인 성품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기 위함이고, 둘째는 이 명령 안에 들어있는 비밀 즉, 그렇게 하면 너는 2.계속적인 그분의 긍휼을 옷 입는 자가 될 것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4.

제 작년에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의 거의 유작같이 인생의 마지막 때에 쓴 일상의 예배 시리즈의 3권으로 나온 책이 한국말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돌봄의 영성(Spirituality of Caring)이란 책입니다(책 그림). 이 책은 그가 하바드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토론토 인근에 위치한 지적  장애우들을 위한 공동체인 Daybreak'에서 만난 아담(Adam)을 섬기면서 깨달은 돌봄의 영성을 정리한 것으로 네 챕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긍휼은 우리가 따라 가야 할 예수님의 길이며, (2)긍휼은 진실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고, (3)긍휼은 절망을 치료하는 해결책이기에, (4)긍휼은 자신을 온전히 회복하는 길이다.  

그는 돌봄긍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아담(Adam)이라는 한 아이에게 무조건적으로 부어져야 하는 돌봄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 돌봄이 어떤 신비를 가지고 있는지를 나눕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돌봄은 인간의 모든 몸짓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그 돌봄의 몸짓은 우리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하고 긍휼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용감한 고백에서 비롯된다. 긍휼이 우리를 나와 같은 형제자매들과 하나로 묶어 준다. 그들도 나처럼 경이로움과 고통이 어우러진 인생길을 걷고 있다.

 

우리는 성공해서 칭찬받고 많은 친구의 관심을 얻으면, 즐겁고 자신감이 생기고 편안해진다. 반면 퇴보해서 비난받고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면, 슬프고 자기 회의에 빠지고 외로워진다. (바로 그 순간이 나를 보는 시간이며 나도 돌봄이 필요한 때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어느 순간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속히 깨닫게 된다.)

 

건강의 개념을 강한 심장, 튼튼한 허파, 힘센 근육, 생생한 기억력, 예리한 통찰력, 기민한 이해력을 갖춘 상태로 제한하는 한 우리의 인생관은 지극히 편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이가 훨씬 많다. 지금 그렇지 않더라도 곧 그렇게 된다. 인생의 강도를 만나는 것은 예정된 것이다. 그를 돌보는 것 또한 예정된 하나님의 은총이다.)

 

돌봄의 영성이 가져다주는 큰 혜택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게 한다는 점이다. 비록 해결할 수 없지만 고통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다. 무능과 연약함은 인간의 실존이다. 내가 돌보는 고통당하는 이들은 우리의 거울이며, 또 다른 ''..... 나는 때로 일이 틀어지거나, 일의 진행이 지지부진해서 불안이나 짜증이나 좌절을 느낄 때면 아담을 떠올렸다. 아담이 나에게 태풍의 눈처럼 다시 잠잠해지라고 타이르는 듯 했다. 어느새 우리는 입장이 바뀌었다. 아담이 내 스승이 되어 내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내 삶의 어수선한 광야를 나는 아담과 함께 통과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복인 것입니다. 그는 단연코 그 분의 긍휼과 그분의 긍휼을 받은 누군가로부터 긍휼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폭력으로 바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다섯 번째 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니라....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고 공유하고 그를 돌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천국이 어디 있을까요? 그는 이미 매 순간 하나님의 긍휼을 옷 입는 자임에 분명할 것입니다.

 

 

찬양하십시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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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설교일 : 2017.09.17.
본문말씀 : Matthew 5:8
설교자 : Rev.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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