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게시물 417건, 최근 0 건

행복하여라: 애통하는 자여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7-09-11 (월) 20:05 조회 : 68
8.13,_2017_주일설교말씀_1.docx (15.3K), Down : 0, 2017-09-11 20:05:13
설교일 : 2017.08.13.
설교자 : 장찬영 목사
본문말씀 : 마태복음 5:3~4

5:3-4(장찬영목사)                                                           8. 13, 2017

 

                                행복하여라, 애통하는 자여

 

1.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존스 홉킨스(Jones Hopkins) 병원의 한 정신과 의사가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미국에 있는 적지 않은 분들이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근간에는 북한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에70%이상의 국민들이 우려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오늘날 같이 복잡한 사회구조와 또 미디어를 통해 거의 모든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스포츠 등 심지어 잡다한 정보까지 모든 내용을 시시각각으로 전해 듣게 되다보니, 자기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음에도 거대한 스트레스군에 휩싸이기에, 의도적이라도 단순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웃고 밝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제로 미국이건 한국이건 서점에 가 보면 의외로 유머에 대한, simple thinking에 대한 책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한국의 한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 제목이 유머 세미나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현대인에게는 좀 무거운 주제나 눈물, 혹은 애통과 같은 말은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런 분위기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메시지도 부담을 주거나 무거운 것보다는 짧고, 간결하고, 정보력이 있고, 유머가 있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인 심령이 가난한 자, 아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도 역설이지만, 아마 이 구절이야말로 역설 중에 역설의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금부터 최소한30-40년 전만해도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애통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전쟁의 참화가 지나간 한반도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먹고 살만한 시대가 된지가 그리 오래 전이 아닙니다. 힘든 가난의 시대, 눈물의 시대, 애통의 시대를 온 몸으로 겪고 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 분들에게는 서구인에 비해서, 예수님의 이 애통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낯설지 만은 않습니다.

 

저는 여렸을 적, 교회에서 이런 애통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습니다. 당시 교회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모르는 백성들에게 마음놓고 울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무슨 죄가 그렇게도 많으셨는지, 무슨 한이 그렇게도 많으셨는지... 새벽기도 때 마다, 철야 때 마다 얼마나들 우시든지. 그야말로 당시 마루바닥은 매 예배 때마다 눈물로 범벅이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우는 것 애통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독교에는 기쁨과 환의, 감사와 감격, 축제적인 요소도 충분히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른 눈을 가진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보다 젖은 눈을 가진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훨씬 더 은혜의 세계를 깊이 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을 모르는 교회보다 가난을 아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훨씬 더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

일반적으로 성경에는 애통이라는 단어는 9개 정도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 오늘 본문에 쓰인 예수님이 쓰신 단어는 헬라어로는 펜쎄오(πενθέω/pentheo)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외입니다. 이 단어는 어느 정도 슬퍼하고 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의 애통을 얘기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펜쎄오의 애통을 가장 잘 묘사한 말씀은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야곱의 애통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에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셉이 하루아침에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에 팔린 것이지만, 이것을 숨기려고 형들이 요셉의 옷에 피를 묻혀 짐승들이 해하였다고 거짓증언을 하였고, 이때 이 아버지 야곱은 옷을 갈기갈기 찢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두르고, 땅을 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날마다 통곡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장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앞에 애절하게 통곡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사용하신 애통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애통이라는 말의 뜻이 이렇게 강하고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져야 하는 감정의 단어가 사실이라면, 이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적용하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날마다 울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애통을 우리의 삶에서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정한 애통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이 굳이 애통의 정도가 가장 강한 펜쎄오(pentheo)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아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이 단어의 어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본문에서 사용하신 이 펜쎄오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그 어원이 히브리어의 페싸흐(פּּסח/Pethah)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것이 왜 놀랍냐 하면, 페싸흐라는 단어의 뜻이 첫째는 애통하다. 슬퍼하다와 동시에 psssover(뛰어넘다) 유월절을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 주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애통이 원어적으로 유월절을 뜻하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애통이 유월절 사건과 연결되어 있을까요? 유월절 사건은 아시다시피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는 도중, 불순종한 애굽 땅에 임했던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이었습니다.

 

또 동시에 그 사건은 그 날 밤,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른 집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유월절(Passover)의 은혜를 경험했던 날이기도 합니다.

12:21b-23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 이 날은 분명 애굽 온 땅의 장자가 죽었던 가장 큰 슬픔의 날, 애통의 날 펜쎄오의 날였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가장 사랑했던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애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랑이요 기력의 시작이었던 장자의 죽음 앞에서 모든 애굽 땅은 애통펜쎄오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역시도 그 날 밤, 온 땅을 뒤 덮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구원을 받으면서 경험하게 된 또 다른 애통의 시간이도 했던 것입니다.

 

그 날 밤, 그 죽음의 영이 나의 집과 나를 뛰어넘어 갈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대절망의 가난한 심령이 되어,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어린 양의 피가 나를 살리는구나....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펜쎄오의 가장 큰 슬픔이지만, 나에는 페싸흐 유월절(Passover)의 애통이 되는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날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무엇이지요? 그것은 친히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셔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유월절 그 날 밤, 온 애굽의 장자들을 죽인 심판의 공포 앞에서, 그리고 그 하나님의 절대적인 임재 앞에서 통곡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나를 위해 주님이 친히 어린양이 되셨다고 하는 진리를 깨달으면서 갖게되는 새로운 애통,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자가 경험하는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의 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일까요? 기도생활일까요? 금식일까요? 전도일까요? 헌신일까요? 순종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부인(self-denial), 자기 죽음이 가장 어렵습니다.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이 없는 기도와 금식, 전도, 헌신과 순종은 결국 자기의 만족과 자기의 보챔을 채우거나 대신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돌아보면서 가장 절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 자기 부인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은 자아개발이나 독서,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야만 나를 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하면서 비로소 자기를 본, 그래서 자기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울의 애통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말씀은 감탄문이 아닙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아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 비탄에 빠져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글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 애통을 경험하신 분이 계십니까? 복이 있는 분입니다. 분명해 진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기개발이나 자기완성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유월절 밤, 어린 양의 피, 십자가로 인한 자기절망, 자기부인, 자기죽음의 그 애통을 통과한 자가 누리는 부활이 있을 뿐입니다.

 

 

3.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애통파쎄오가 자기 자식이 죽는 큰 애통이 아닌, 페싸흐 즉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한 구원을 경험할 때 오는, 자기 절망, 자기 죽음, 자기 부인의 애통이라면,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애통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의 죄와 자신의 죄성, 도무지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무기력한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는 자가 갖는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오늘날의 교회가 지극히 가벼운 자기 기쁨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내가 하고 있는 예배나 어떤 사역, 헌신과 봉사, 인간관계 등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절망과 자기부인의 애통이 계속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겉으로는 주님과 교회를 섬긴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기 기쁨과 자기 만족을 위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을 자기의 삶에서 오는 연민의 눈물로 착각하고 있지 않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는 삶의 무거움이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랑하는 이와의 별리, 오랜 시간 동안의 투병,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물질적인 절망감, 오래동안 삶을 괴롭히는 상처받은 마음. 그러나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이 그저 나의 연민과 삶의 무게에서 오는 정도의 애통에서 멈추어진다면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히려 나의 모든 것의 주재이시고 나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아시는 그 분 앞에 나가, 오히려 나 자신의 연민의 애통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애통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51:17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할 마음이 바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 애통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51편의 배경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이후, 아무도 모르고 지나간 줄 알았던 그 무렵,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하나님이 슬퍼하신다는 책망을 받은 후에 썼는데, 이 시의 시간적인 상황이 그 때가 밧세바로부터 낳은 첫 아들이 죽었을 때 고백했던 노래라고 하는데서, 우리의 묵상을 좀 더 넓혀 볼 이유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2장에 보면, 다윗은 아기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음식을 전폐한 체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그야말로 자식의 죽음에서 오는 펜쎄오(pentheo)의 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이를 데려가십니다. 신하들로부터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후의 모습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삼하12:19b-20(다윗이)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너무 냉정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십시오. 다윗은 자기 자식을 위해 금식하면서 죽도록 애통하였지만, 주님이 아이를 데려가시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애통 가운데 머물지 않고, 주님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자식을 잃으면서 오는 큰 슬픔, 펜쎄오의 애통이 그 가운데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애통하는 페싸흐의 애통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을 그것은 다윗이 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셨다라고 표현한 분이 계십니다.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라는 여성 분입니다(사진 1,2,3). 보시는대로 이분은 두팔과 두 다리를 쓰실 수 없는 분입니다. 1949년 생이니까 올래 68세입니다. 17살 때, 다이빙을 하다가 척추를 다쳐 목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마비되어 살게 됩니다.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어요. 놀랍게도 시편을 묵상하다가, 그는 시편에서 다윗의 눈물이 아니라, 다윗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픔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울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애통하는 자들을 찾아가 이 하나님의 눈물하나님의 애통을 전합니다. 이분이 이 하나님의 눈물에 대해서 쓴 책이 When God Weeps이라는 책입니다(책 그림) 한국에서는 하나님의 눈물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분이 몰트만이라는 독일 신학자인데,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목으로 책을 쓰셨어요(책 그림).

 

 

4.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자가 복이 있습니까? 자기의 애통에서 멈춘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내가 아파하는 것 보다 더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눈물하나님의 애통을 가진 자입니다

 

한국 강원도에 [예수원]을 설립했던 성공회 사제였던, 한국이름이 대천덕이라는 신부님이라고 계십니다. 이분은 시카고 무디성경학교의 첫 교장이었던, 복음주의자 R.A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목사님의 손자이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예수원에 생존해 계시는 동안 늘 왼쪽 가슴에 검은 베를 달고 사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유는 오늘 이 순간도 주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과 기아, 전쟁으로 죽어가는 생명들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으로 인한 자기 죽음의 표식이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잘못에 대한 회개의 의미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대해 대신 뉘우치겠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와 죄성을 보고 절망하는 자의 슬픔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그리고 세상에 만연한 죄악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피조물들의 아픔과 고통의 탄식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 갇힌 자의 아픔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아픔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이후에 시편 119:13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내 눈의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 내립니다... 다윗은 비로소 하나님의 눈물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눈물은 다윗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자기 맘대로 사는 자의 강포와 무례, 그로인한 억압과 압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애통하는 자에게 주님은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위로가 아닙니다. 위로라는 헬라어는 파라클레오(parakleo)인데, 이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뜻하는 파라클레토스(prakletos)의 동사형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번역을 해도 되지만, 정확한 뜻은 성령님께서 만져 주실 것이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눈물, 하나님의 애통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친히 위로해 주십니다. 이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 앞에서 세상의 애통자기 죽음, 자기 부인의 애통으로 경험한 하나님의 자녀가 소유하게 되는 하나님의 애통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성령께서 친히 만져 주실 것입니다. 아멘.

 

먼저, 이 찬양을 한번 들어 보시고 같이 찬양하겠습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마음은


   

총 게시물 417건, 최근 0 건
번호 설교일              제목 본문말씀 설교자
417 2017.11.05.  'Only for the Lord' Romans 14:6-9 Rev. Lee
416 2017.11.05.  오직 주를 위하여 로마서 14:6~9 이훈경 목사
415 2017.10.29.  A church as a faith community Acts 9:8~19A Rev. Jang
414 2017.10.29.  교회창립45주년기념 -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 사도행전 9:8~19A 장찬영 목사
413 2017.10.22.  'Blessings to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Matthew 5:10-12 Rev. Jang
412 2017.10.22.  행복하여라: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여 마태복음 5:10~12 장찬영 목사
411 2017.10.15.  The Story of a Father's Wasted Love Luke 15:11-24 Rev. Kwon
410 2017.10.15.  낭비된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 누가복음 15:11~24 권태홍 목사
409 2017.10.08.  Like Father, Like Son Ephesians 2:1-8 Rev. Joseph Kim
408 2017.10.01.  'Blessings to the Peacemakers' Matthew 5:9 Rev. Jang
407 2017.10.01.  행복하여라: 화평케 하는 자여 마태복음 5:9 장찬영 목사
406 2017.09.24.  The Unrighteous Steward Luke 16:1~9 Rev. Shin
405 2017.09.24.  불의한 청지기 누가복음 16:1~9 신태규 목사
404 2017.09.17.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Matthew 5:8 Rev. Jang
403 2017.09.17.  행복하여라: 마음이 청결한 자여 마태복음 5:8 장찬영 목사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제목 : 'Only for the Lord'
설교일 : 2017.11.05.
본문말씀 : Romans 14:6-9
설교자 : Rev. Lee

HOME

교회소개

환영의글
담임목사 소개
비전과 사명
섬기는 사람들
예배시간&오시는 길

말씀

주일예배설교
수요예배설교
새벽예배설교
목양칼럼
읽는말씀(English&Korean)
Bible Time
성경필사

양육

유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한국학교
하람 청년부
소망대학
Troy Hope
KKCA

선교

선교통신
케냐선교
중국 · 연변 · 북한선교
몽골선교
방글라데시선교
태국선교
페루선교
아이티선교
북미(미국)
우크라이나선교
기타선교권

나눔터

공지사항
찬양영상
사진 게시판
새가족 사진게시판
새땅지